•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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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사회는 ‘한국 여자의사 120년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 25일 열린 전국여의사대표자대회에서 정 이사의 발표 시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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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사회 이향애 회장은 “1900년대 근대 의료는 여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여의사들은 근대 역사에서 큰 이정표를 남기는 많은 일을 했는데 이를 정리해서 120년사를 만들려고 한다”고 밝혔다.

 


동경여의전 졸업한 송복신, 학생 독립운동 일선서 활동


일본 의학전문학교 입학한 고수선, 독립운동 모의하다 고문당해


3.1운동으로 실형 받은 최정숙, 제주서 진료-교육 힘써


여자의사회 정인주 공보이사 “선교사들 세운 병원·학교 기반으로 독립운동 활발”


여자의사회 이향애 회장 “여의사, 일제 강점기에 의료봉사로 여성사 큰 획 그어”


 

[현대건강신문=박현진 기자] “우리나라 1세대 여자 의사들의 발자취를 쫒다 보니 독립운동이 보였다”


김정동, 송복신, 최정숙 등 이름도 생소한 우리나라 1세대 여자 의사들은 의료 봉사와 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의료인으로, 독립운동가로 한국 근대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한국여자의사회(여자의사회)는 ‘한국 여자의사 120년사’ 편찬위원회(편찬위)를 만들고 본격적인 자료 조사에 나섰다.


편찬위 간사를 맡은 여자의사회 정인주 공보이사는 “편찬 준비 이전에는 누가 누가인지 몰랐다”며 “(1세대 여의사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지만 소중한 사진 등 자료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여자의사회는 ‘한국 여자의사 120년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 25일 열린 전국여의사대표자대회에서 정 이사의 발표 시간을 마련했다. 


정인주 공보이사는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의 행적을 쫓기 위해서는 구한말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이사의 발표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은 구한 말 개항 시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산, 인천, 원산 등에 관립병원을 세우고 일본 의사들을 배치했다.


당시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의료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한양, 평양 등에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1885년부터 1901년까지 선교단체 등이 26개 조선 지역에 29개 병원을 세웠다. 이들 병원과 학교는 독립 운동가 양성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일제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도립병원을 세워 선교병원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심지어 일부 도립병원을 선교병원 입구에 세우기도 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도립병원이 56개로 많아지고 최신 의료시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환자들이 선교병원에서 도립병원으로 옮겨갔다.


1940년 일제는 선교병원의 자산을 몰수하고 선교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선교사들은 조선 의사에게 병원을 넘기고 조선을 떠났다.


다시 구한말로 되돌아가면 1888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이 세워진다. 보구여관은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으로 고종 황제가 이름을  지었다.


선교사로 조선을 찾은 로제타 홀은 1890년부터 빈민가 의료선교를 시작했고 1885년 스트랜트 부인은 우리나라 첫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개설했고 이곳에서 공부하고 1896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대에 들어간 김정동이 학교를 졸업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사가 됐다.


이후 김점동은 조선으로 돌아와 10년간 의료봉사를 하던 중 35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박유신과 결혼해 이름을 박에스더로 바꾼 김정동은 아이가 두 명이 있었지만 모두 사망했다.    


1923년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송복신은 애국여학생 결사체에 속해 독립단체 요원으로 활동했다. 2.8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민족자결운동 문서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와 학생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송복신은 이후 미국으로 간 뒤 영국인 은행가와 결혼했다. 


동경여의전에 재학 중에 독립운동을 위해 1920년 여자학흥회를 조직했던 유영준은 1927년 근우회를 조직하고 이후 유영준은 좌익 단체 위원장으로 월북했다. 


근우회 발기인 35명 중 길정희, 정자영, 현덕신, 이덕요, 유영준은 동경여의전 출신이었다.


제주도에서 상경한 고수선은 1919년 3.1운동 때 붉은 댕기 수천 개를 만들어 조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시했고 상해로 보내는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고수선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일본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손가락이 불구가 되었다. 고수선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제주 서귀포에서 의원을 열고 진료에 매진했다. 


수녀회에 입회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최정숙은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후 최정숙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했고 38살에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했다. 1943년 경성의전 2회 졸업생인 최정숙은 제주 유일 여성학교인 신성여학교를 재개교하는 등 제주에서 진료와 교육에 힘썼다.


발표를 마친 정인주 공보이사는 “‘기록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것으로 돼 버린다’는 말이 인상에 남는다”며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여의사들의 행적을 기록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의사회 이향애 회장은 “1900년대 근대 의료는 여의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여의사들은 근대 역사에서 큰 이정표를 남기는 많은 일을 했는데 이를 정리해서 120년사를 만들려고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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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여의사 쫓았더니 끝에는 ‘봉사·독립운동’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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